♧통찰력이 필요한 이유: 내가 설명한 대로 명상의 고요함은 다음 특징을 가졌다.
산만하지 않음: 즉 주의력을 의도적으로 하나의 명상 대상에 맞추고 거기에 머무는 것.
명료함: 즉 방종에서 벗어나는 것.
유익함: 즉 기쁨과 축복.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실상의 의미를 제대로 규정하는 지혜를 키우려면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집중은 불교도와 심지어 불교도가 아닌 사람도 공통으로 수련하나 불교도가 아닌 자의 길은 고통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윤회를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파드마삼바바는 명상의 첫 단계를 이처럼 말한다: 명상 대상에 마음을 고정한 후에 혼란의 씨앗을 없애는 지식의 여명에서 그것을 지혜로 분석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교도가 아닌 자들이 하듯이 집중만으론 고통을 버릴 수 없다.
월등삼매경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세상 사람은 집중을 수련한다 해도 자아의 개념을 없애지 않기에 고통이 돌아와서 그들을 방해한다. 이런 방식으로 집중력을 기른 우드라카가 그러했다. 「비록 세상 사람은 집중을 수행한다 해도」 이 구절은 위의 설명처럼 세상 사람이 산만하지 않고 명료함 같은 특징을 가진 집중을 기른다는 뜻이다.
「자아의 개념을 없애지 않기에」라는 구절은 그 집중을 키우지만 자아의 개념을 없애지 못한다는 뜻이다. 「고통이 돌아와서 그들을 방해한다」는 세상 사람이 자아의 개념을 없애지 못했기에 여전히 고통이 생김을 나타낸다. 어떤 명상이 해탈로 이끄는가?
앞에 인용한 월등삼매경의 바로 다음 구절에 이렇게 말한다: 현상 속에서 자아가 없음을 분석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명상 속에서 그 분석을 닦는다면 이로 인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고요함을 얻지 못한다. 첫 구절은 조건을 제시한다. 만약 무아의 현상을 분석적으로 이해한다면, 그 후에 무아의 의미를 이해하는 지혜를 키우게 된다.
둘째 구절의 「그리고 명상 속에서 그 분석을 닦는다면」은 자신이 성취한 무아의 철학적 관점을 명상 속에서 지속하고 키우는 것을 말한다. 셋째 구절에서 「이로 인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것이 목표, 즉 열반이나 해탈을 얻는 원인이란 뜻이다. 해탈은 지혜를 키워야 성취할 수 있다. 지혜가 없이 다른 길을 닦아서 해탈을 이룰 수 있는가?
넷째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고요함을 얻지 못한다」 이는 다른 길을 수련하더라도 그 지혜가 없으면 고통과 고뇌를 잠재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경전은 오직 무아의 지혜만이 윤회의 근원을 자른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도가 아닌 현자들조차 집중력이나 초지식 같은 많은 좋은 자질들을 가졌지만 무아의 개념을 얻지 못했기에 윤회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앞에서 인용한 보살들의 경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순한 집중에 만족하고, 경전에서 설명하는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부풀려진 자부심만 키우고 명상의 길에서 심오한 의미를 단순한 집중으로 오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명심하며 나는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자는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 스승은 자기 뜻을 분명히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이는 다른 사람에게 무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뛰어난 외부의 영적 안내자가 무아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연구와 성찰이 없어도 자기 내면에서 무아의 개념을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반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모든 승리자(깨달은 자)의 경전은 일부는 실상에 대해 명료하게 가르치고, 심지어 명료하게 가르치지 않더라도 어쨌든 간접적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혼돈의 어둠은 실상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기 전에는 극복하지 못하지만, 그 지식이 생길 때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의 고요함(몰입하는 마음) 자체가 순수하고 미묘한 지혜가 되는 것이 아니며 혼돈의 어둠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혜를 구해야 하며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아, 즉 실상의 의미를 분별하는 지혜를 찾을 것이다」
파드마삼바바가 명상의 두 번째 단계를 말한다: 고요함을 얻은 후에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세존의 모든 말씀은 직간접적으로 잘 설명하셨다. 그것들은 모두 실상을 밝히고 가리킨다. 실상을 안다면 새벽녘에 어둠이 걷히듯 독단적 견해의 얽힌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명상의 고요함만으로 순수하고 미묘한 지혜가 나오지는 않으며, 흐릿한 어둠을 씻어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실상에 대해 잘 명상하기 위해 지혜를 사용한다면, 순수하고 숭고한 지혜에 도달하고 실상을 알 것이다.
진실로 지혜를 통해서만 명료하지 못함을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고요함을 유지하고 지혜를 사용하여 실상을 구할 것이다. 명상의 고요함에만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실상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만물은 두 개의 자아, 즉 인간의 자아와 현상의 자아가 공이다. 모든 바라밀 중에 실상을 아는 것은 지혜 바라밀이다. 명상의 부동심이나 다른 바라밀을 통해 이것을 알 수 없기에, 지혜의 완성을 위해 단순히 선정을 굳건히 하는 것을 지혜로 오인하지 말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해심밀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존이시여, 현상의 본질이 없음을 이해하기 위해 보살이 어떤 바라밀을 알아야 하나이까?」 「관음보살이여, 너희들은 지혜바라밀을 통해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대승에서 믿음을 키우는 경전은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지혜가 없는 한, 보살의 대승수행을 믿는 자들이 제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대승수행을 하더라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