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양명산에 있었어요. 국립공원인데 아름답고 외딴 곳이죠. 그땐 텐트에서 살았죠. 날씨가 매우 추웠어요. 정말 너무 너무 추웠어요. 산은 그리 높은 것 같지 않았어요. 차를 타고 천천히 계속 올라가거든요. 경사가 완만해서 산 정상에 이르러도 그리 높게 느껴지지 않죠. 또 산정상 일부분은 평평해요. 그래서 오래전에 어떤 사람들이 이 산에 집들을 지었어요. 물론 요즘은 건축 허가가 안 나죠. 국립공원이 됐으니까요. 아주 평탄해졌어요. 난 양명산에 작지만 집이란 걸 갖고 있었어요. 아주 먼 길을 걸어가야 했어요. 차로 정상까지 간 뒤 계단을 올라가야 했죠.
계단이 몇 천 개인지 몰라요. 적어도 수백 개는 되겠죠. 그 후에는 다시 또 걷고 계단을 오르고 또 걸어요. 얼마나 걸리는진 기억이 안 나요. 아마 적어도… 누구 기억하나요? (20분입니다) 20분이에요. 거기 아래서부터요. 우리 홀 꼭대기에서요. 당신 걸음으로 20분이면 내 걸음으로는 최소 40분은 걸릴 거예요. 대만(포모사) 형제에게 물어봤더니 그는 20분이 걸렸다고 했어요. 하지만 정상에 도착해서 다시 20분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거죠. 그가 20분이면 난 아마 3, 40분이나 1시간이 걸릴 거예요. 내 시자들은 1시간이라고 말했죠. 걷다가 중간에 쉬어야 한다고요.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넓은 평지예요. 내겐 충분히 넓어요. 평지에 대나무 숲도 있어요. 대만(포모사) 타이페이 제자들이 육각형 집을 내게 깜짝 선물했죠. 침실은 맨 위에 숨겨져 있고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넓은 공간이 있고… 물론 내겐 충분히 넓어요. 난 작으니까 그들이 짓는 건 다 커요. 정자 같아요. 내가 요리하는 방송에서 몇 번 봤을 거예요. 아니면 그 정자에서 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방송에 나갔죠. 맨 위층엔 작은 침실이 있어요. 또 지붕 위에는 물을 뿌리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요. 사랑의 배려죠.
여러분 형제 한 사람, 지금은 가족과 호주로 갔는데 그가 타이페이 등지에서 온 다른 형제 자매들과 같이 설치했어요. 그가 주로 작업했어요. 건축업자여서 그가 지었죠. 물 뿌리는 장치를 지붕에 설치한 건 내가 비를 아주 좋아한단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가 마법으로 만든 강우 장치인 셈이죠. 또 여름에는 지붕도 식혀 주죠. 그래서 에어컨이나 그런 건 없었어요.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선풍기는 있었죠. 요리는 정자에서 했고요. 정자는 텅 빈 상태였죠. 방충망도, 문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모기는 기억 나요. 이 대나무 숲에 아주 많았지만 날 절대 물지 않았어요. 주변에 있는 시자들도 모기에게 물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모기들은 봤죠. 와! 모기가 떼로 있었죠. 대나무 숲 여러 곳에 무성하게 떼 지어 있었어요. 내가 봤어요. 하지만 몇 번 정도였죠. 날 성가시게 하지 않아 있는지 잘 몰랐으니까요. 근데 참 이상해요. 요즘엔 도시에서도 어디서나 날 물어요. 이상하죠. 내 피가 더 달콤해진 건지 내 업장이 더 매력적으로 된 건지 모르겠어요. 둘 다일지도요.
난 그곳을 정말 좋아했죠. 거기 올라갔던 그 당시엔 제자가 많지 않았어요. 거기서 난민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에 내려왔어요. 난민을 돕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했죠. 난 정말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거기 있을 때 난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해진 듯했어요. 욕망도 욕구도 없었죠. 아주 간소한 곳이었죠. 침실 하나만 있었어요. 침대가 있었나 모르겠는데 난 그냥 바닥에서 잤어요. 물도 나오게 연결했고 전기도 들어왔어요. 믿어지나요?
이 사람들은 정말 신통했어요. 그가 건축업자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는 가족과 유복하게 살았어요. 그들이 돈을 공양해도 내가 안 받으니 거기로 올라간 거죠. 그곳은 사유지였을 거예요. 물어본 건 아니고 그렇게 추측을 했죠.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큰 대나무 숲이 있었고 다른 과실수들도 있었어요. 국립공원이 되기 전,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던 예전의 이야기죠. 물론 정부에서 경작을 하거나 뭘 심거나 작은 오두막을 짓는 건 계속 허용했어요. 큰 집을 짓고 콘크리트와 시멘트 등을 사용하는 건축물은 안 되지만 목재 오두막은 괜찮았죠.
듣자 하니 요즘에 그곳이 너무 오래되고 태풍에 여기저기 파손되어 그들이 올라가서 수리를 하려고 한다 길래 내가 이렇게 말했죠. 『뭐 하러요? 먼 길이라 자재 등을 가지고 올라가려면 고생할 테니 그냥 놔둬요』 내가 다시 거기 살 호사는 누리지 못할 것 같아 그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라는 거예요. 그냥 명상하는 곳으로만 쓰라고 말했어요. 그 동안 몰래 올라가서 수리할지 모르겠어요. 기념관으로 삼으려고요. 후세대를 위해 보존해서 내가 죽은 후에는 참관할 수 있는 표를 팔지도 모르죠. 『칭하이 무상사께서 전에 여기서 사셨어요. 자, 이건 신발이고요. 저기선 요리를 하셨죠』 사람들은 고인의 집이나 거처를 그렇게 안내하고 참관하잖아요.
사람들이 무리 지어 와서 그 힘든 계단길을 저 위까지 걸어 올라가겠죠. 그러곤 경배하거나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를 만지며 축복을 빌겠죠. 아마 방 한 가운데 내 동상을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맞이하게 할 거예요. 산 정상에서 20분이나 걸어가야 해요. 차는 못 올라가니까 저 아래쪽에 주차해 놓고요. 그리고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해요. 그런 다음에 계속 더 가야 하죠. 가로세로 2m인 작은 창고가 있었어요. 철판을 주변에 빙 둘러 놓고 위에 지붕을 얹었죠. 난 거기서 지내곤 했어요. 옆에는 시내가 있었죠. 시냇물이 있었어요. 그 점이 맘에 들었어요. 난 그때 돈이 많지 않았는데 그곳을 샀어요. 형제한테 돈을 좀 빌려서요.
이미 갚았어요. 그는 사양했지만 갚았죠. 『난 일체 받지 않으니 이 돈을 받아요』 했죠. 큰돈은 아니에요. 그 작은 장소는 아주 저렴했거든요. 건축 허가는 나지 않아서 그냥 철판을 몇 개 어떻게든 연결해서 네모난 방으로 만들었어요. 몇 장은 위에 얹었고요. 언제든 철거하기 쉬웠죠. 큰 텐트도 있었어요. 대나무 등 있는 재료를 써서 캔버스 텐트를 쳤죠.
그때도 우린 홍법을 했었죠. 작은 단체였지만 이미 홍법하고 있었죠. 전단이나 소식지를 사람들이나 제자들에게 배포해서 그들이 계속 가르침을 공부하고, 격려를 받고, 힘을 얻어서 계속 명상하며 비건식을 지켜나가도록요. 그때는 일반채식이었어요. 난 원래 우유를 안 먹었고 우유를 안 좋게 여기지도 않았어요. 나중에서야 젖소들을 돌아설 수도 없는 좁은 우리에 가두고 묶는 등의 정말 참혹하고 잔인한 비인도적인 풍습을 보게 되었죠. 오, 세상에! 그래서 그때부터 우유를 금했어요. 우유 자체는 채식 범주에 들어가더라도요. 살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젖소를 다루는 방식이 아주 비인도적이죠. 우리나라에서 보던 방식이 아니었어요.
어울락(베트남)에선 그러지 않아요. 암소든 수소든 들판에서 자유롭게 다니죠. 그리고 소들은 힘든 일을 해주고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밭을 갈거나 해요. 농사철에는요. 농사철에 이따금요. 소 외양간도 각각 있고요. 거기서 자고 아침에 목동과 밖으로 나와 풀을 뜯으러 가죠. 대부분 여유롭게 잘 먹고 보살핌을 받아요. 시골 농부는 암소나 수소에게 농사를 의존하니 소에게 아주 잘해주죠. 구타나 다른 어떤 강압 행위는 없었어요. 난 보지 못했죠.
인도에 있었을 때는 소가 사람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봤어요. 암소나 수소가 길이나 고속도로에서 낮잠을 자고 있으면 차가 다 멈추죠. 그건 알죠? 직접 보진 않았어도 영화 같은 데서 봤을거예요. 난 직접 봤어요. 인도에선 어디를 가나 소가 존경받고 사랑받죠. 사람처럼요. 사람들은 소의 발이나 둔부를 만진 뒤 자신의 손을 이마에 대며 존경을 표해요. 인도에서 힌두교에 따르면 소는 신성하기 때문이죠. 아이들에게 젖을 주고요.
당시엔 다른 시설이나 대안이 없었기에 소의 젖으로 많은 아이를 키웠어요. 그래서 인도에선 소를 대리모처럼 여겼죠. 둘째 엄마인 셈이죠. 지금도 여전히 인도인들은 그렇게 해요. 내가 거기 있었을 때는 그렇게 했어요.
인도인들은 뭐든 자신들이 먹는 걸 소에게도 줘요. 때로 채소가 남으면 거리에 던져놔요. 그럼 소가 와서 먹죠. 소는 어디든 자유롭게 다녀요. 그리고 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소에게 양보를 해야 해요. 모든 차들이 멈춰 서죠. 소가 휴식을 끝내고 일어나서 기지개 펴고 느긋하게 옆의 풀밭으로 가거나 다른 거리로 가서 풀을 뜯거나 누울 때까지요. 내가 본 건 그랬어요. 그래서 우유가 해롭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죠. 게다가 나는 전에 불교를 공부했어요.
부처가 처음 삼매에서 나왔을 때는 매우 약해져 있었죠. 다른 이에게 배운 극단적인 수행법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들은 말하길, 먹고 마시지도 말고 굶주려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명상만 하면 열반을 얻을 거라고 했죠. 나중에 부처는 그게 잘못됐음을 깨달았어요. 부처가 거기서 나와서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 그 여인이었는데 부처에게 우유를 줬죠. 그렇게 부처는 기력을 회복했고 계속 수행의 길을 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난 우유가 괜찮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나중에 현대의 축산업이 아주 비인도적이고, 악랄하고, 끔찍하고, 야만적인 걸 알고서 우린 우유를 마시지 않죠. 여러분 중에 아직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영화들을 보세요.
『도미니언』 PETA의 영상물 『지구 생명체들』 『소에 관한 음모』
수프림 마스터 TV에선 어쨌든 이런 영화들을 무료로 홍보하고 있어요.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고요.
사람들이 무고하고 무력하고 무방비하고 온순한 동물들에게 하는 그런 잔인한 행태와 학대 행위를 다룬 다른 영상들도 있어요. 친구들에게 보여주세요. 함께 시청하세요. 울게 되더라도요. 동물들의 고통을 보면 비명이 나오겠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보도록 해요. 고기 먹고 술 마시고 음주운전 등을 하는 그런 사람들하고요. 그러한 행위의 결과를 보여주도록 해요. 섬뜩하다는 걸 알아요. 나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볼 수가 없었어요. 영상을 다 보기 위해선 난 때로 여러 부분을 봐야만 해요. 그래야 여러분에게 말하고 수프림 마스터 TV에 그걸 홍보하라고 말할 수 있어요.
TV에서 끔찍한 부분을 다 보여주진 않아요. 아이들에게는 너무 민감한 내용이니까요. 그 영화의 제목을 홍보해서 사람들이 그걸 찾아 시청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여러분도 능력껏 그걸 보여줄 수 있죠. 내게만 의존하지 말아요. 수프림 마스터 TV에만 의존하지 말아요. 어떤 곳에서는 이런 TV 채널이 있는 줄도 모르니까요.
세상을 구하는 일을 우리, 나에게만 맡기지 말고 나와 함께 구해요. 알겠어요? (네!) 53%는 스승의 힘에서 온다고 했죠. 강연이나 TV 진행자를 통해 전해주는 축복을 통해서요. 신들의 축복도 함께 전해지죠. 그런 식으로 수프림 마스터 TV는 세상을 축복해요. 각 물 방울이 다 중요해요. 그것이 모여 바다가 되죠. 그러니 부디 나와 함께 세상을 구해요. 의지할 데 하나 없고, 지켜주고 옹호하고, 그들의 고통을 목청 높여 폭로하고 대변하는 사람 하나 없이 고통받는 동물들을 도와주세요.
매번 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난 수 없이 내 지성을 차단해야 해요. 안 그러면 동물들의 고통을 알기에 고통에 몸부림치며 온종일 울 거예요. 그래서 차단해야 해요. 안 그러면 활동을 못해요. 수프림 마스터 TV 일을 할 수 없죠. 여러분을 위하고 세상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어요.
난 강하고 강인해야 하지만 늘 그렇진 못해요. 내 동굴 내 방에서 혼자 있을 땐 수없이 울면서 내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요.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나고 내 자신이 우는 줄도 몰라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요. 친구들에게 축산업의 끔찍한 관행을 보여주세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인간성을 잃고, 인간의 품성을 잃고, 자비심과 동정심을 잃고 있는지 알려주세요. 사랑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