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ST: 지난 방송에서 로베르 뀔라 신부님은 채식주의와 동물 학대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교회의 발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셨습니다. 로베르 뀔라 신부님이 오늘은 2015년 『찬미 받으소서』회칙 221항을 인용하며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물 친구와 환경과 조화롭게 살도록 변할 것을 호소합니다.
R.C.: 마지막은 221항으로 교황님의 요청입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개의 이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어 살기를 요청합니다』 분명히 드러내어 살라, 『우리가 받은 은총의 힘과 빛이 다른 피조물』 동물들을 포함해서요. 『그리고 우리 주변 세상과 관계에서도 숭고한 형제애로 드러나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숭고한 형제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입니다』 숭고한 형제애, 지금 보편적 교감이 있어요. 제게 그것은 바로 보편적 교감이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그토록 훌륭하게 실천하신 모든 피조물과 숭고한 형제애』입니다.
HOST: 로베르 뀔라 신부님은 실제로는 금지된 육식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많은 기독교인의 잘못된 개념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용한 구절과 자신의 저서 『동물에 대한 성서적 사유』에서 강조한 비건과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성경 말씀과 모두에게 비건을 지시하는 창세기 29~30절의 놀라운 발견을 설명합니다.
R.C.: 『동물에 대한 성서적 사유』라는 책 제목이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다른 일을 하는 사제들과 달리 이 책의 목적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동물의 나열이 아닌 일종의 성서적 동물학을 세우는 것입니다. 저는 목록을 만드는 것에 관심도 없고 그것이 목표도 아니며, 이 책의 목적은 종교적이고 신성한 책인 성경 이후에 우리 인간이 동물과 맺는 관계, 그리고 분명하게 믿음의 틀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의 일부로 맺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동물과 어떻게 관계할지에 대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이 책에 설명한 모든 연구 자료 중에서 제가 이룬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이상하게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자와 신부, 성경을 읽는 신자라면 자기가 찾는 것이 어딘가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채식을 하며 동물과 다른 생물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을 갖게 되면서 이전에 수백 번 읽었어도 마음에 다가오지 않던 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상하죠. 그 구절은 창세기 1장 29절입니다. 우리 방송을 보는 시청자께 말씀드리면, 성경의 처음 창세기에는 2장이 있는데, 첫 2장은 세상의 창조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받아들이신 모든 피조물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언급하는 첫 이야기는 7일 단위로 구성됩니다. 인간의 일주일을 가져오셔서 첫날과 그 이후를 말하며 신의 모든 창조를 묘사합니다. 6일간의 창조가 끝나고 29절과 30절이 나옵니다. 29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창조한 동물과 물고기와 남자와 여자가 보기에 좋았으며, 그들에게 음식을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음식을 주셨듯이 동물에게도 주셨으며, 성경에 이러한 용어는 분명히 없으며 약간 구식이지만 지금 사람은 그것을 비건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너희는 열매와 씨앗과 채소를 먹으라고 하시며,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말라, 그것은 내 뜻이나 계획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가 엄청나게 감동한 큰 발견이라고 생각하며, 왜 이 구절이 숨겨져 있었는지, 우리가 왜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 자신에게 물었지요.
왜 아무도 말하지 않을까? 제 생각에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중요해 보이는 세 개의 자료가 성 바울의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으며, 종종 이것을 피조물의 탄식으로 부릅니다. 그러니 이제 정확한 구절을 알려드리며, 시청자를 위해 얘기하면 그건 로마서 8장 19~22절입니다.
거기에는 성 바울의 훌륭한 견해가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은 우주적이며, 즉 궁극적으로 남자와 여자만이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전적인 기독교 신학을 원하고 여기에 분명히 논리가 있다면, 동물은 죄를 짓지 않고 무고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만이 현재와 과거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만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만 구원받는 것은 분명히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생각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에서 이 점을 많이 받아들인 것은 모든 피조물이 서로 함께한다는 거죠. 물론 우리는 다른 종으로 구성된 한 가족입니다. 사람이 고양이나 개와 같지 않고 물론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창조에 있어 하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피조물의 일부만 구원하지 않고 우주적으로 구원합니다.
성 바울의 매우 흥미로운 다른 두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있는데, 각각 1장에 있습니다.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잡으려고 하셨다』 보다시피 남자와 여자만이 아닌 거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온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 』 만일 우리가 골로새서를 본다면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성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골로새서에서 이 찬송의 끝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 즉 남자와 여자만이 아닌 만물이 『모든 충만으로 거하게 하시고』 그분은 만물을 원하시고, 늘 이 만물을 강조하며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이것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사』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분명히 보게 되며, 바울에겐 남자와 여자의 구원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된 피조물의 구원임을 알 수 있죠. 확실히 이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매우 훌륭한 이상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할 것이며, 그분의 찬미 받으소서 회칙에서 최종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아주 흥미롭지요. 제가 방금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동물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고전적 교리를 기억하시죠.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서는 여전히 그렇게 말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교황님께서 더 나아가 성 바울에 맞춰 이 교리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며 교황님을 말합니다.
『다른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나아갑니다』 그러니 보다시피 이 표현은 훌륭합니다. 우리와 동시에 보여주며 제가 말했듯이 모든 피조물 사이의 연대와 우리를 통한 연대를 뜻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