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색과 금언 - 영감: 광채의 가느다란 강 -마더(채식인)』를 소개하며 깨달음을 위한 영적 여정을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더 혹은 스리마로 알려진 미라 알파사는 187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미술과 음악, 작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진정한 관심사는 삶의 영적 측면이었습니다. 그녀의 내적 체험과 스리 오로빈도임을 나중에 알게 된 한 성인의 안내로 1914년 인도로 여행했고, 처음 그를 만났습니다.
VO(f): 『스리 오로빈도를 보자마자 크리슈나로 부르던 유명한 존재를 그에게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장소와 일이 인도의 그가 있는 곳 가까이 있음을 완전히 확신했죠』
스리 오로빈도는 그녀가 신성한 어머니의 관념의 화신임을 인식하고 『마더』라는 호칭을 주었습니다. 1926년 스리 오로빈도는 아쉬람을 만들기로 하며, 아쉬람의 운영과 관련된 모든 영적, 물질적 업무를 마더에서 일임했습니다. 그 후 50년간 그녀 사랑의 인도 아래 아쉬람은 구도자를 위한 영적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마더는 2개의 단체를 더 설립했습니다. 유치원부터 대학 수준의 과정을 제공하는 스리 오로빈도 국제 교육 센터와 오로빌 또는 새벽의 도시로 부르는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마더는 또한 광범위한 영적 저술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들은 신과의 궁극적 합일이란 목표와 또한 자신과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녀의 모든 작품에는 신에 대한 마더의 사랑과 헌신이 빛납니다. 마더는 비록 1973년 육신을 떠났지만 17권 작품집은 구도자에게 빛나는 길잡이이자 영감의 원천입니다.
마더는 저서 『사색과 금언』에서 스리 오로빈도의 다음 구절을 인용해 설명합니다.
『영감은 광대하고 영원한 지식에서 뛰어오르는 빛의 가느다란 강이다. 그건 이성이 감각의 지식을 능가하는 것보다 더 완전히 이성을 넘어선다』
『여러분이 던진 질문 중 일부는 비슷합니다. 「왜 스리 오로빈도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런저런 것들을 말입니다. 나는 대답할 수 있죠. 「그는 그렇게 보았기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선 한 가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스리 오로빈도가 말한 정의이며, 우리를 사색으로 이끌기 위해 대부분 역설적인 형태로 주어집니다. 사전적 정의는 흔히 이해하는 단어들의 일반적인 설명이며, 이것은 사색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리 오로빈도가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을 깨뜨리고 더 깊은 진실과 접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질문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스리 오로빈도가 이런 식으로 표현한 더 깊은 지식, 더 깊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것은 단어를 정의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몇 가지 질문을 골라보죠. 첫 질문은 사려 깊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저에게 흥미를 일으켰는데, 「지식」이라는 말이죠. 스리 오로빈도가 이 금언에서 그 말을 사용한 방법과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금언에서 사용한 방식을 비교합니다.
지난주의 금언에서 스리 오로빈도가 「지식」과 「지혜」를 비교했을 때, 그는 말한 지식은 보통 사람의 의식에 존재하며, 노력과 정신적 발달을 통해 얻는 지식이고, 반면에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지식은 본질적인 지식, 초의식적인 신적 지식, 독자성에 의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광대하고 영원하다」라고 묘사했으며,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인간의 지식이 아님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스리 오로빈도가 강이 「가늘다」고 말한 이유를 많은 사람이 묻습니다. 이것은 무한한 영감의 근원인 신성하고 초의식적인 지식의 광대함과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차이를 충격적으로 대비하는 의미심장한 이미지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영역과 접할 때도, 말하자면 감지하는 부분은 최소이며 가늘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물줄기나 떨어지는 몇 개의 물방울과 같고, 이 물방울 자체가 매우 순수하고 빛나고 완전해 경이로운 영감을 느끼게 하며, 무한한 영역에 도달했고, 평범한 인간의 상태보다 매우 높게 올라간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인식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또한 심령적 존재나 초자연적 의식이 영감을 인식하는 매개체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론 그렇습니다. 더 고차적 영역과의 처음 접촉은 초자연적 접촉입니다. 확실히 내면이 심령적으로 열리기 전엔 이러한 영감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예외로, 그리고 예외적인 조건에서 은총으로 올 수 있지만 진정한 접촉은 심령을 통해 옵니다. 초자연적 의식은 확실히 신적 진리와 가장 큰 친화력을 가진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정신 의식에서 정신을 넘어, 더 높은 마음을 넘어, 더 높은 의식으로 올라가고 마음을 초월한 영역으로 자신을 열 때, 마음을 초월해 초의식으로 갈 때 직접 영감을 받을 수 있지요. 그때 자연스럽게 영감은 더 자주 오며, 더 풍부해지고, 말하자면 더 완전해집니다. 영감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때가 오지만 이것은 분명히 상당한 내적 진보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방금 말했듯이, 마음보다 훨씬 높은 영역에서 오는 영감은 가치와 질이 이성과 같은 마음의 가장 높은 성취를 능가합니다. 이성은 확실히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정점입니다. 이성은 감각의 도움으로 습득한 지식을 검토하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감각은 지식의 불완전한 도구이고, 감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감각이 제공하는 정보는 피상적이며 매우 자주 결함이 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이성이 완전히 발달하면 인간의 이성은 이것을 알고 감각의 지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비이성적일 때만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완전히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보다 높은 이성의 영역으로 발전하자마자 이 모든 개념이 거의 본질적으로 거짓이며, 결코 그것에 의존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초의식이나 신의 영역에서 받는 지식은 적어도 이성이 감각의 지식을 능가하는 정도로 이성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실천 상에서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영감의 능력을 개발하나요?」 「영감을 받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영감을 계속 받을 수 있나요?」
이에 대해 이미 대답했어요. 정신을 초월한 영역에 자신을 열면 끊임없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때까지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최대한 침묵하게 하고 위로 향하게 하며, 침묵과 주의 깊은 수용의 상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더 고요하고 완전한 마음의 평온을 이룰 수 있다면 더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영감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는지 묻습니다. 영감의 근원은 하나입니다. 영감은 항상 순수한 지식의 영역에서 내려와, 인간의 어떤 부분이든 가장 수용적이고 영감을 받기에 가장 적합한 부분으로 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감을 다양한 행동 영역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지식의 영감, 진보를 위한 노력에 기여하는 영감이 될 수 있으며, 실용적이고 외부적 인식을 돕는 행동의 영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감의 질보다 영감을 사용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영감은 항상 인간의 의식을 꿰뚫는 데 성공한 한 방울의 빛과 진리와 같습니다. 인간 의식이 이 방울로 하는 일은 태도, 필요성, 기회.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그것이 영감의 본질적인 성질을 바꾸지는 않지만 그것의 용도, 즉 실제적인 적용을 변화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