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
세상은 한 방울의 이슬처럼 둥글지요. 현미경도 작다고 덜 완벽한 미소 동물은 찾을 수 없습니다. 눈, 귀, 미각, 후각 운동, 저항력, 식욕 영원을 붙잡고 있는 생식 기관, 이 모두가 작은 생명에 존재할 공간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모든 행위에 생명을 담습니다.
무소부재함의 진정한 교리는 신이 모든 이끼나 거미줄에 신의 모든 부분을 재현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가치는 모든 점에서 자신을 투영하려는 것입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친화력이 있으면 반발력이, 영향력과 억제력도 있지요.
그래서 우주는 살아있습니다. 만물엔 이치가 있습니다.
우리 안의 영혼은 감정이고 우리 밖의 영혼은 법칙입니다.
우린 그 영감을 느끼며 역사 속에서 그 치명적인 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있고 그것이 세상을 만들었다」 정의는 미뤄지지 않습니다.
완벽한 공평함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균형을 맞추며 언제라도 신의 주사위를 던질 수 있습니다. 세상은 구구표나 수학 방정식처럼 당신이 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고 저절로 균형을 이룹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당신 계산만큼 정확하게 되돌아옵니다.
침묵 속에 확실하게 모든 비밀이 드러나고 모든 범죄는 처벌받으며, 모든 미덕은 보상받고 모든 잘못은 시정됩니다. 소위 응보라는 것은 부분이 나올 때마다 전체가 나타나는 우주적 필연성입니다. 연기가 보이면 당연히 불이 있듯이 손이나 팔다리가 보이면 그것이 속한 몸통이 뒤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행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 자체로 보상받거나 달리 말해 완성됩니다. 첫째는 사물 또는 실제 자연에서 둘째는 상황 또는 명백한 본성에서 그렇지요.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응보라고 합니다. 인과응보는 사물에 있고 영혼은 그걸 봅니다.
상황 속의 응보는 이해하면 보이며 사물과 뗄 수 없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드러나기에 긴 시간이 지날 때까진 명백하지 않습니다. 잘못하고 시간이 흐르면 채찍질이 따르니 그것은 동행하며 뒤따라오게 됩니다. 죄와 벌은 한 줄기에서 나옵니다.
처벌은 그것을 감춘 쾌락의 꽃 속에서 예기치 못하게 익어가는 열매입니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 씨앗과 열매는 분리할 수 없으며, 결과는 이미 원인 속에서 꽃피고, 목적은 수단 속에 열매는 씨앗 안에 미리 존재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총체이고 분리를 거부하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행동하고 분리하여 내 것으로 삼죠. 예를 들면 감각을 만족하려고 인격에 필요한 감각에서 쾌락을 분리합니다. 인간의 창의성은 늘 한 가지 문제의 해결에 몰두했습니다.
즉 관능적 감미로움, 관능적 강렬함, 관능적 눈부심 등을 도덕적 감미로움, 도덕적 심오함, 도덕적 정당성에서 분리하는 법, 다시 말해 이 윗면을 아주 얇게 잘라 바닥없고 다른 끝은 없이 한쪽 경계만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영혼이 말하죠, 먹어라; 그러면 몸은 연회를 엽니다.
영혼은 말하죠, 남녀는 하나의 육체와 영혼이 되리라; 그럼 몸은 살과 결합할 뿐입니다.
영혼은 말하죠, 미덕을 목적으로 만물을 다스리라; 그러면 몸은 자기 목적을 위해 사물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영혼은 만물을 통해 살고 일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게 유일한 사실일 겁니다. 거기에 모든 것, 바로 권력, 쾌락, 지식, 아름다움이 더해질 겁니다. 어떤 사람은 거물이 되고 자신을 위해 주장하고 개인적 이익을 위해 거래하고 값을 깍습니다.
특히 자기가 타고 싶은 걸 타고, 입고 싶은 걸 입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며 주목받기 위해 다스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람은 위대함을 추구해서 직위와 부, 권력, 명성을 얻으려고 합니다. 위대하게 되는 것은 자연의 다른 면인 쓴맛이 없는 달콤함의 한 면만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분리는 꾸준히 반작용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유해야 하지만 그것에 성공한 시도자는 없습니다. 분리된 물은 우리 손 뒤에서 다시 만납니다. 우리가 전체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자마자 즐거운 것에서 쾌락이, 이득이 있는 데서 이득이, 강한 것에서 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밖이 없는 안이나 그림자 없는 빛이 없듯이 사물을 소유하며 관능적 선을 얻을 수는 더는 없습니다. 「갈퀴로 천성을 몰아내면 바로 다시 달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