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이 어디 있고,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천국을 발견하는 방법과 우리 보물을 매일 사용하는 방법을 안다면 매일 내면으로 웃을 수 있죠. 그걸 사용하며 또한 나눠줄 수도 있어요. 내면의 천국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아름다운 축복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과 신뢰를 느끼며, 아주 친하고 가깝게 또 위로를 느끼게 됩니다.
왜 누군가가 이 내면의 힘을 얻으면 무소부재할 수 있을까요? 그가 온 우주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 도교에서는 만물 동일체라고 하죠. 중국어로 여러분과 우주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또는 그리스도가 말했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아버지』는 무얼까요? 모든 존재의 원인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의 부모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와 하나라면, 여러분이 온 우주와 하나라는 말이죠. 그런 의미예요. 그는 이 깨달음의 상태, 더 높은 의식 수준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이란 얼굴에 후광을 빛내며 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어요. 지혜안이 열린 사람은 여러분이 빛으로 둘러싸인 것을 볼 수 있죠. 예수님의 그림이나 부처님의 그림, 성인들의 그림에서 주위에 후광이 있는데 그게 그들의 빛이죠. 그러니 그들은 (내적 천상의) 빛이 있으며 사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의미예요. 사실 빛은 존재하지만, 이 (내적 천상의) 빛은 우리의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알아볼 순 없어요. 우리는 지혜안, 또는 천안, 신의 눈, 부처의 눈, 혹은 도의 눈, 등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눈도 있어요. 아주 많은 종교에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에 혼란스럽죠.
이 눈을 얻는 법과 이 (내적 천국의) 빛을 얻는 법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내가 오늘 밤 여러분에게 온 목적입니다. 여러분과 이 신의 힘, 그리스도의 힘, 부처의 힘에 맞추는 간단한 기술을 공유하고 싶어요. 그럼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되고, 부처가 되고 예수님처럼 『너와 네 아버지는 하나다』가 될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신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죠. 모든 존재가 아버지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말하죠, 『신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 우리가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았다는 거죠. 하지만 오직 그분만 혹은 소수의 제자가 그걸 깨달았고 시간을 들여 우주에서 자신의 위대한 경지와 위대한 지위를 발견하려 수행했으니까요. 우린 그렇게 안 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무지하고 죄송하지만 『거지』처럼 길거리를 배회합니다. 여러분이 거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내 말은 자신의 타고난 위대함에 비해 우린 정말 거지라는 뜻이에요. 우린 거지보다 못해요.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지 안다면, 이전의 무지가 정말 안타까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죠: 『너희는 신의 아들이다. 너희는 신이 될 수 있고 천국을 찾을 수 있다. 보라, 천국은 너희 안에 있고 지금 천국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도 49년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계속 말씀하셨죠: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누구나 불성이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분 말을 소수만이 들었어요. 왜 그럴까요? 우린 자신의 습관과 환경의 영향에 너무 깊이 빠져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 세상 너머에 다른 것이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해요. 돈, 자동차, 집, 남편과 아내, 자녀, 이런 모든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걸 믿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릴 이런 수준의 이해에 묶어 두니까요. 세상은 그것만 이해하길 바라지 그 외는 아니에요.
우린 매일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때론 우리의 마음에 매우 빠르게 번쩍입니다. 『이게 뭐지? 이 삶은 무얼 위한 걸까? 이건 뭐지? 천국을 알고 싶어. 신을 알고 싶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다음 순간 아이들이 와서, 『엄마, 나 이거 갖고 싶어요, 저거 주세요』 아니면 남편이 와서 둘이 싸우면 그걸로 끝이고 천국은 사라지죠. 다음 순간 천국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신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존재가 됩니다. 더는 신을 알지 못합니다. 짜증이나 남편 혹은 아내와 다투거나 입 닥치라고 말하는 법만 알게 되죠. 그러다 너무 짜증이 나서 텔레비전을 켜고 이 코미디언들과 함께 웃으면 그걸로 끝이죠. 그게 우리의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안타까워요. 행복해지기 위해 TV가 필요하진 않아요. 코미디언이 웃겨줄 필요도 없고요. 천국이 어디 있고,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천국을 발견하는 방법과 우리 보물을 매일 사용하는 방법을 안다면 매일 내면으로 웃을 수 있죠. 그걸 사용하며 또한 나눠줄 수도 있어요. 내면의 천국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아름다운 축복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과 신뢰를 느끼며, 아주 친하고 가깝게 또 위로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힘을 얻으신 후에 크고 당당하게 외치셨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죠. 과장하신 게 아니라 진실을 말씀하셨어요.
예수님과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기에, 나도 여기서 똑같은 말을 반복할게요. 우린 같은 임무를 가졌죠. 이 말에 여러분은 충격이 크겠지만, 이 말을 안 하면 달리 무슨 말을 할까요? 뭐 하러 여기 왔겠어요?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게 부끄러워 빨리 말했어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내 성격 탓인 것 같아요. 너무 솔직하거든요. 때론 숨기지 못하고 잊어버려요. 때로는 유연하지 못하고 자주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냥 『폭탄』처럼 말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요. 하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신께서 정하시니까요. 신이 집에 가라고 하시면 집에 갈 겁니다.
지혜가 충분히 열렸다면 내가 말하는 걸 믿겠죠.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의미가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지 않았어요. 그러니 내가 어찌 많은 것을 기대하겠어요? 오늘은 첫날이니 나는 어떻게 친구를 사귈 것인지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오랜 친구라고 느끼게 하죠? 그리고 나는 생각했죠. 하지만 내면의 신의 힘이 우릴 하나로 묶을 것이며, 언어는 아주 작고 편리한 경험일 뿐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요. 즉 그것은 별 차이가 없어요.
대부분의 경우 위대한 스승은 사람을 바꾸려고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요. 그들은 눈과 에너지, 광채를 사용합니다. 몇 분 전에 말했듯이 이 그리스도의 힘을 얻은 사람은 이런 종류의 확신과 신뢰할 분위기를 발산하고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을 믿게 만들고 매우 편안하게 느끼게 합니다. 그는 손길과 눈빛으로도 많은 병을 고칠 수 있죠. 예수님은 신통을 쓰지 않았죠, 모두 그분이 신통을 쓴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그분 자신이 신통입니다. 그분과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나 유익함을 얻고, 축복과 치유, 기쁨을 얻었어요, 그런 겁니다. 그분의 제자조차 이런 축복의 힘을 가졌을 겁니다.
오늘 차 안에서 제자들이 이 관음법문을 수행하면서 얻는 유익함에 대해 말했어요. 자, 관음이란 뭔가요? 관음은 내적 (천상의) 진동, 내적 (천상의) 음악을 관한다는 겁니다. 내면의… 음악이라고 말할 순 없네요. 그렇다고 음악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동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성경에는 말씀, 소리, 진동이라고 나와 있어요. 이렇게 나와 있죠. 『태초에 말씀이 계셨나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 모든 것이 이 말씀으로 만들어졌고, 이 말씀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씀은 소리, 진동, 내면의 음악, 천상의… 뭐라 할까요… (영원한 신의 소리요) 네, 그거예요. 고마워요.
중국어로는 『진동력』 내면의 진동을 뜻하죠. 하지만 이 진동은 귀로 들을 수 없어요. 인간의 어떤 감각기관을 사용해 만지거나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내면의 감각을 사용해야 하고 내면의 감각은 내면의 자아에서 오죠. 내면의 자아가 진아입니다. 그건 육체가 아니에요. 이 몸에 살고 있는 자, 그게 우리의 진아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지혜 또는 내적 (천상의) 진동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내면의 자아가 깨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큰 각성을 경험했다고 말할 때 그건 정확히 이런 뜻입니다. 『각성, 누가 각성하죠? 매일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도 우리가 깨어나지 않았다고요?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 농담이 아닙니다. 우린 깨어 있지 않아요. 우리가 깨달을 때만 깨어 있어요. 내면의 자아가 깰 때만요. 지금은 잠들어 있죠. 그러므로 우리는 내면의 세계나 하나님이나 천국의 축복을 경험할 수 없어요. 우린 이 세상에 있으며, 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이며 필멸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헤엄치고 고통받고 있죠. 그래서 우린 죽은 겁니다. 오 또 충격을 드렸네요. 우리가 깨어날 때 다시 살아납니다.
내면으로부터 각성을 경험할 때, 우리의 진정한 자아, 진정한 사람이 각성할 때, 왕자가 와서 생명의 입맞춤을 해주면 우린 깨어납니다. 그게 깨달음의 순간이고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모두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