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호리 스코보로다는 18세기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종교 음악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저술에서 여러 곡의 노래를 찾을 수 있으며, 몇 곡은 우크라이나 민속 음악이 되었습니다. 스코보로다의 작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문화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도덕주의자이며 『소크라테스』로 불렸고, 그의 작품은 사색과 자기 성찰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스코보로다의 글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재치 있고 극적이며, 주제는 항상 삶의 행복과 감사를 강조합니다. 스코보로다는 생전에 자기 작품을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글이 지향하는 도덕적 가치에 맞춰 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그는 가장 친한 친구와 지내기 위해 갔습니다. 그는 매일 집을 나섰는데 나무 밑에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는 때가 왔다고 알리며 그대로 누워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요청한 비문입니다. 『세상은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작품과 수많은 공로를 인정받은 흐리호리 스코보로다는 우크라이나에서 유통하는 두 번째 큰 액수인 5백 흐리브냐 지폐에 초상화가 새겨졌습니다. 이제부터 『삶의 진정한 행복에 대한 다섯 여행자의 대화』에서 발췌한 그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신은 자연이며, 신을 아는 것이 행복이다
『가장 자비로운 자연은 예외 없이 모든 영혼에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모두 좋은 결말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좋은 결말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만물의 어머니인 자연이 숨 쉬는 모든 생명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지 않았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을 불, 물, 바람, 쇠, 바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왜 신을 자연으로 부르지 않는가요? 신의 이름으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적합한 이름을 찾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뚜라는 라틴어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이란 기계 안에서 태어난 만물을 일컫습니다. 하지만 마치 씨앗 안에 아름답게 꽃피는 나무가 숨어있다가 자라는 것처럼, 온 세상과 그 기원이 숨어있고 모든 피조물을 아우르는 그분을 왜 자연이란 이름으로 부르지 않나요?
더욱이 『자연』이란 말은 태어나서 변화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힘이 도형으로 표현되는 구체처럼 그 중심점은 어디에나 있고 그 둘레는 없으며, 항상 존재하는 힘의 비밀스러운 이치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과 같지 않나요? 그것을 자연이라 부릅니다. 그 외부 표면에서 만물이 발생하거나 우주 어머니의 자궁에서 시간이 시작했듯이, 그 비밀의 무한히 깊은 곳에서 만물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누구에게 받아서 낳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낳기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로 불리고, 또한 시작도 끝도 없고 시간이나 공간에 의존하지도 않는 원리로도 불립니다. 화가는 이것을 원이나 고리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이빨로 꼬리를 물고 있는 똬리를 튼 뱀으로 묘사합니다. 어디에나 있고 전능하며, 전지한 힘의 작용은 모든 물질에 두루 끝없이 영원하게 퍼져있는 비밀 법칙, 지배자 또는 왕국으로 부릅니다.
항상 존재했기에 언제 시작했는지, 언제나 있을 것이기에 얼마나 오래갈지, 항상 모든 곳에 있기에 어디까지 확장하는지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지요. 『물질의 어둠을 통해 모든 곳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나의 이름과 나의 자연을 볼 수 있다면 어찌하여 너는 내 이름을 묻느냐?』
이름은 자연 안에 있고 자연은 이름 안에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둘은 같은 것이고 둘은 영원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믿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나의 이름을 안다. 하지만 나의 이름을 알려는 이는 나도 모르고 내 이름도 모른다. 둘은 같기 때문이다. 내 이름과 나는 하나이다』 『나는 바로 그이고, 나는 바로 나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경건한 마음이 주는 이름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진실하고 선합니다. 한 사람이 빵으로 알고 다른 이가 누룩빵으로 알더라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문제없습니다. 모세와 이사야는 신을 나라고 부르며, 그들 뒤의 바울은 말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다』
신학자는 다른 이름으로 『신은 사랑이다』고 하죠. 그가 말한 사랑은 모든 곳에서, 언제나, 그리고 만물에 동일한 단순한 합일입니다. 사랑과 합일은 같습니다. 부분의 합일은 신에게 이질적입니다. 그래서 분열은 불필요하며, 파괴는 완전히 배제됩니다. 예레미아는 신을 칼로, 바울은 신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부르지만 둘은 같은 뜻입니다.
이 칼은 썩기 쉬운 모든 것과 옷과 같이 낡게 되는 모든 것을 베어버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과 왕국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행복을 아브라함 시대, 솔로몬의 조상들, 다윗왕의 통치, 학문, 사회적 지위, 타고난 재능이나 부에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지 않으셨고, 모든 행위에 공정하십니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 우리 시대, 우리 나라에서 행복을 찾지만 행복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린 행복 안에 있고 행복이 우리를 찾아냅니다. 행복은 어디나 있기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행복은 햇빛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영혼에 행복으로 갈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행복은 언제나 당신의 벽을 두드리며 입구를 찾지만 그것을 찾지 못합니다.
당신의 가슴은 나락의 끝에 선 것처럼 어둡고 기쁨이 없습니다. 소중한 화관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친 짓이 아닌가요? 왜 그렇게 하나요? 마치 소박한 모자를 쓴 자가 『영원히 보는 눈을 가지신 거룩한 이여, 내 말을 들어주세요』라는 기도가 위로 향하며 닿는 복된 우주의 빛을 누릴 수 없는 것과 같지요. 자기에게 가장 좋고 가장 바람직한 걸 찾지 못한 사람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있을까요?
우리는 바다와 땅, 공기와 하늘을 측량하고 금속을 캐내기 위해 땅을 파헤쳤습니다. 우린 행성의 궤도를 추적했고, 달에서 산과 강과 도시를 찾아냈으며, 무수한 미완성의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불가사의한 기계를 만들었고, 큰 심연을 메웠고, 물길을 막고 방향을 돌렸습니다. 매일 우리는 새로운 실험을 하고 미친 발명품을 만듭니다. 도대체 우리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슬픈 것은 이 모두 안에 위대함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무언가가 빠져 있습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린 아직 말할 수 없는 아기와 같습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오직 울고 좌절을 느낄 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분명한 불만은 모든 과학이 우리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보여주지 않나요?
당신은 영혼의 심연을 채우는 과학을 봅니다. 우리는 영국 종탑의 시계와 같이 산과 바다와 도시가 있는 행성의 무수한 회전 시스템을 먹어 치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파합니다.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