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불만을 떨칠 수 있나요?』 네, 맞아요. 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서 입문하고 고양돼야 해요. 그러면 모든 짐이 씻겨나갈 겁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어디로 가는지 알기에 그렇게 슬프지 않죠. 스승이 와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걸 볼 것이니,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수행하고 나면, 모든 친구와 친척이 더 행복한 영역으로 가는 것을 보니까 슬퍼하는 대신 행복하게 느껴요.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죠,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니까요.
『칭하이 무상사님, 두 가지를 질문하겠습니다. 첫째 스승님이 가르치는 수행법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고, 둘째 이 수행과 다른 수행 사이에 어떤 충돌이 있을 수 있나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는 여러분에게 이 성스러운 신의 힘 또는 내면의 빛과 접촉하고 내면의 말씀 또는 내면의 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집중하는 법을 보여주죠. 그것이 기본적으로 이른바 법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말도 사용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모든 종류의 천국, 풍경, 또는 다양한 의식 수준에 대해 설명할 것이며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자기 경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외적인 것을 설명하지만 법문은 완전한 침묵으로 전해요. 내가 침묵하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수할 때 (내적 천국의) 빛을 보고 (내적 천국의) 소리를 듣게 될 거예요. 지금 내가 말해도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해요. 그래서 이 법문은 사실 법문이 아니라, 내면의 힘을 사람에서 사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이라고 불러요. 「印心」 (啊) 입문이죠. 『마음의 도장』을 뜻해요. 그게 전부입니다. 『마음』은 육신의 심장이 아닌 내적인 힘, 내면의 지혜를 의미해요. 그래서 실제로 말할 수 있는 법문이 없어요, 신과 접촉할 때를 제외하고는요, 그 후에 전할 수 있어요. 신이 하도록 허락합니다. 알겠나요?
그러면 무엇을 보든지 깨달음을 얻고 (내적 천국의) 빛을 보게 되고 (내적 천국의) 소리를 듣게 되며 천국의 거처를 보게 될 거예요. 예수님을 볼 수도 있고 부처님을 볼 수도 있으며 그분들께 고대의 지혜를 배울 수도 있어요. 그것이 이 법문의 이점이고 법문의 성과이지만 법문 자체는 법문이 아니죠. 단지 (내적 천국의) 빛이란 등불을 침묵으로 전할 뿐입니다.
이제 『약간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첫 단계는 무엇일까요? 입문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지혜의 눈을 열도록 기꺼이 허락하고 지혜의 귀를 열도록 기꺼이 허락하고 내적 신의 축복의 힘을 열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그 후엔 매일 그걸 사용하죠. 내게 열쇠가 있으니까요. 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가 있다고 들었죠. 이제 그가 나에게 줬어요.
『소책자 105쪽 여섯째 줄에 첫째, 내적 (천국의) 소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나요?』 이것이 맞나요? 『가령, 임신 기간 후에 고주파는 자궁 안의 태아에 의해 기록될 수 있어요. 임신의 의미는 논리적으로 내면의 소리 주파로 이어지며 출생 후 반응을 설계하니까요』 내가 당신만큼 똑똑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이분이 나를 좀 더 깨우쳐 줄 수 있나요? 깨우침을 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여기 없는 것 같아요) 모두 갔나요? 그러면 문제가 해결됐네요.
집에 가면, 글이 어려워 내가 이해한 것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요. 『자궁 안에 이미 진동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그는 내가 쓴 것과 다르게 이해했어요. 그것은 다른 거예요. 나는 책에 그렇게 쓰지 않았어요. 책에서 나는 자궁 속의 아기가 이 경이로운 (내적 천상의) 소리와 접촉하기 때문에 (아기)가 아주 행복하다고 말했어요. 아기는 거꾸로 있어도 여전히 행복하죠. 신의 힘과 접촉하고 있기에 익사하거나 불만을 느끼지 않아요; 그것이 내 말의 의미죠. 그는 과학 장치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에 대해 이야기해요.
『어떻게 과거 모습을 통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는 걸 멈출까요?』 그냥 그만둬요. 보지 말아요.
『어떻게 하면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하는 불만을 떨칠 수 있나요?』 네, 맞아요. 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서 입문하고 고양돼야 해요. 그러면 모든 짐이 씻겨나갈 겁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어디로 가는지 알기에 그렇게 슬프지 않죠. 스승이 와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걸 볼 것이니,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수행하고 나면, 모든 친구와 친척이 더 행복한 영역으로 가는 것을 보니까 슬퍼하는 대신 행복하게 느껴요.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죠,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니까요. 왜 슬퍼하는가요? 가령 누군가 당신을 떠나거나 죽었을 때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슬퍼합니다. 상실감을 느끼죠.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즐기는지, 심지어 방문할 수 있다면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수행의 비결이죠. 바로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이유이며 이점이죠.
『혼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조직된 종교나 규율에 맞춰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해요. 종교는 도울 수 없어요. 종교는 과거 깨달음을 얻은 스승들이 남긴 교리일 뿐이죠. 우리가 참조할 수 있고 지금 우리의 깨달음과 비교하고, 우리가 고대 스승들과 일치하는지 우리의 방법이 바른지, 우리의 깨달음이 그들과 같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그것이 교리의 이점입니다.
방금 예수님을 언급했듯이 그분이 입문 혹은 세례를 받을 때 -사실 세례는 입문을 뜻해요-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적 천국의) 빛이 오는 것을 봤어요. 이제 칭하이 무상사에게 입문을 받고 (내적 천상의) 빛이 비둘기나 어떤 모습이든 내려오는 것을 보면 『아 그래, 그녀도 같은 방법으로 전하네』라고 알 수 있죠. 단지 참고할 뿐입니다. 성경은 달리 우리를 깨우칠 수 없어요.
어떤 종교의 경전도 내적 (천상의) 빛과 내면의 행복과 만족을 얻는 데 도울 수 없어요. 오직 진짜로 살아계신 신의 힘에서 전수해야 우리의 모든 욕망이 채워집니다. 이것이 새롭나요?
『입문하려면 하루에 두 시간 반 동안 명상해야 해요. 나무묘법연화경을 외우는 것으로 대신해도 될까요? 이 종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요』 사실 당신이 그것을 계속 외우든 말든 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당신 종교에 반대하지 않죠. 다만 그것을 외우는 데 시간을 할애하면 이 조용한 힘과 접촉할 고요한 침묵이 충분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입을 사용하면 바쁘니까요. 신은 암송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와요. 나도 당신에게 무언가를 암송하게 가르칠 것이지만, 입이 아닌 지혜를 사용하죠. 그러면 우리 법문을 통해 (내적 천상의) 빛을 찾을 수도 있어요.
『텃밭을 가꾸고 채소를 재배할 때 채소를 먹기 위해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불교와 모순될까요? 이런 낮은 생명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갈등이 느껴진다면, 우리 모두 굶어 죽는 게 낫다고 조언하고 싶어요. 숨 쉬는 것조차 수많은 무형의 생명을 죽이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채소를 먹을 수 없죠. 채소를 재배할 수도 없고요. 숨도 못 쉬고 걸을 수도 없어요, 우리가 죽이니까요, 그것은 모두 생명체죠.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불가피한 이 업보는 명상하고 정화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어느 정도 벌레를 죽이고 곤충을 죽여야 하죠… 손을 씻을 때마다 살생하는 거죠. 물건 소독도 죽이는 거예요. 이것을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고 고의로 이렇게 하지는 않죠. 이것은 폭력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 살기 위해 뭘 먹어야 해요. 숨을 쉬어야 하고 손을 씻어야 해요. 하지만 이런 불가피한 업보가 없는 것은 아니죠. 설령 고의로 하지 않더라도 업보는 여전히 존재해요. 여전히 죄가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것을 씻어내기 위해 매일 우리의 법문, 관음법문을 수행해야 해요. 그럼 업에서 벗어나요. 그렇지 않으면 살생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미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화하는 법문을 수행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선행을 베풀고 살생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해요. 아닙니다, 채소를 먹는 것조차 살생입니다. 채소도 생명이 있어요. 그러니 자유로워지려면 이 작은 업장을 씻기 위해 강력한 힘을 사용해야 해요.
원한다면 내일 다시 오세요. 이제 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 법문을 전해야 해요. 입문을 원하지 않으면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지금 나가주세요. 여러분과 함께해서 기쁘며 심사숙고한 후에 내일 다시 오세요. 내일 다시 오세요. 아직 강연이 남았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요. 내일 사람들이 문의하고 요청하면 다시 입문을 줄게요. 하룻밤 동안 생각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칭하이 무상사님의 깨달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고마워요. (좋은 기회입니다. 내일 친구와 친척을 데리고 오세요. 같은 시간 저녁 7시 30분입니다) 네, 내일 또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국은 아주 바쁘기에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매일 입문식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올 수 있지만, 내일은 못 올 수 있죠. 기회를 놓칠지도 몰라요. 자, 입문을 원하는 사람은 모두 앞으로 오세요. 오늘 입문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내일 다시 와도 돼요. 앞으로 오면 내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고 나를 더 분명히 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