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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생활: 우주 속의 인간 - 스리 오로빈도(채식인), 2부 중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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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우주 속의 인간‍

생명에서 나와 마음으로 올라가려고 분투하며, 마음 안에서 단위 자체와 그 세계가 깨어나게 되며, 그 각성에서 우주는 최고 작업에 필요한 수단을 얻고 자신을 인식하는 개별성을 얻는다. 하나 마음은 완성이 아니라 계속하기 위해 일한다. 마음은 예리하지만 제한된 지성을 가진 노동자로, 생명이 제공하는 혼란한 물질을 취하여 그 힘에 따라 개선하고 조정하고 다양화하고 분류하면서 우리의 인격화한 신이란 최고 예술가에게 그것을 건네준다.‍

그 예술가는 초의식에 살며, 초의식은 초인이다. 따라서 우리 세상은 이제부터 마음을 초월하여 더 높은 원리, 더 높은 단계, 더 높은 힘으로 올라가야 하며, 우주와 개인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둘을 소유하므로 서로를 밝혀주고 둘이 조화 속에 합일하게 한다. ‍생명과 마음의 혼란은 육체적인 것보다 더 완전한 질서의 비밀을 알게 되면 사라진다. 생명과 마음보다 낮은 물질은 그 자체에 고요함의 완전한 평형과 무한한 에너지의 작용 사이의 균형을 포함하지만 그 균형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

그 평화는 모호한 게으름, 무의식의 잠이나 오히려 약에 취해 갇힌 의식이란 흐릿한 가면을 쓰고 있다. 진아이지만 아직 감각을 잡거나 나눌 수 없는 힘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조화로운 에너지에서 깨어난 기쁨을 갖지 못한다.‍ 생명과 마음은 무지와 곤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얻으려고 애쓰고 찾는 형태로 이러한 욕구의 감각을 일깨우는데, 이것은 자아 인식과 자아실현을 향한 첫걸음이다.‍

그러면 그들의 자아실현의 왕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신을 초월해야 온다. 생명과 마음을 넘어 우리는 물질적 본성의 균형이 전부 표현된 신성한 진리 속에서 의식적으로 회복한다.‍ 고요함은 게으름도 의식의 봉인된 황홀경도 아니며, 절대적인 힘과 절대적인 자아 인식의 집중이며, 무한한 에너지의 활동인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떨림에서 나온다.‍ ‍

왜냐하면 고요함의 모든 활동은 결핍과 무지한 압박이 아니라 절대적인 평화와 극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평화를 얻으면 우리의 무지는 어둠이 되거나 부분적으로 반사된 빛을 깨닫고, 우리의 욕망은 심지어 가장 무거운 물질적 형태 안에서도 충만함과 성취 속에서 사라지고 모호하고 죽은 열망이 된다. ‍

우주와 개인은 상승 과정에서 서로에게 필요하다. 실제로 항상 그들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서로 이익을 얻는다. 우주는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모든 신성의 확산이며, 개인은 시공간의 한계 안에서 그 집중이다. 우주는 무한한 확장에서 신적 전체성을 찾고, 자신을 느끼지만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다. 확장 속에서 존재는 최초의 단위도 최종 단위도 될 수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소수일 뿐인 자신의 다원적 합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갈망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모든 것의 자기인식의 집합물을 창조한다. ‍

인식하는 개인 안에서 프라크리티(본질)는 푸루샤(영)의 인식을 위해 돌아가고, 세상은 진아를 찾고, 신은 온전한 본질이 되고, 본질은 점진적으로 신이 되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개인은 우주를 통해서 자신을 깨닫도록 강요받는다. 그것은 그의 기반이며, 수단, 영역이며, 신성한 작업의 재료일 뿐 아니라 그가 있는 우주적 생명의 집중이 한계 내에서 일어나고, 모든 속박과 기간의 개념에서 벗어난 브라만(궁극적 실재)의 강력한 통일성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실재인 신성한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신을 보편화하고 비인격화해야 한다.‍ ‍

의식의 보편성 안에서 가장 확장할 때조차도 개인은 여전히 자신의 개별적 감각이 모호하고, 이기적인 표상을 제공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보존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목표를 놓쳤고 그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태어나면서 받아들인 신성한 작업도 마치지 못했다. ‍

우주는 개인에게 생명으로 다가온다. 즉 개인이 정복해야 하는 완전한 비밀의 역학이자 충돌한 결과의 집합체이며, 어떤 최고의 질서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조화에서 분리해야 하는 잠재적 에너지의 소용돌이이다.‍ 이것이 결국 인간에게 진보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는 단지 물질적 본성이 이미 성취한 것을 약간 다른 용어로 다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라면 견딜 수 있는 행복과 적절한 정신적 만족을 보장하는 어떤 체계나 질서가 우리의 진보를 막았을 것이다.‍ ‍

동물은 약간의 필수품에 만족하고 신들은 자신의 영광에 만족한다. 하지만 인간은 최고의 선에 도달할 때까지 영원히 쉴 수 없다. 인간은 가장 불만족하며 한계의 압박을 가장 많이 느끼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어쩌면 오직 인간만 멀리 떨어진 이상을 향한 신성한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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