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가책을 느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업보라고 부릅니다. 업보는 바로 그것이죠. 업보는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걷는 길에 큰 바위를 떨어뜨리거나 우리가 수영하면서 수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이 순조롭지 않은 것 같죠.
예전에 우리 집이 아주 가난하진 않았다고 말했죠. 우리 집이 겉으론 소박해 보여도 부모님은 돈이 있었어요. 내 기억에 예전에 우리는…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내게 금이 든 항아리를 보여주며 말씀하셨죠. 『이게 우리 황금단지야. 여기 묻어둘 테니 엄마 아빠가 죽을 경우 여기 있다는 걸 명심해라, 황금이야!』 집안에 금이 있었지만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집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거기 가서 찾지 마세요. 이젠 없어요! 부모님은 금을 전부 팔았지만 생활비로 충당하기엔 부족했죠. 지금 우리 가족은 아주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아요.
우리 부모님도 일하러 가야 했어요. 그때는 내가 부모님께 돈을 보내지 않았죠. 안 보냈어요. 어쩌다 아프셔서 내게 편지를 쓰시면 약을 좀 보내드렸죠. 그게 다였어요. 나는 이 돈을 가족이 부자가 되는데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은 가난해요. 지금도 여전해요. 심지어 텔레비전도 없어요. 어쩌면 집에 아직 전기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지난 설날에 부모님께 돈이 필요해서 좀 보내드렸어요. 일하기엔 너무 연로하세요. 그래서 말하자면 공금이 아니라 내가 번 돈을 썼어요. 알겠어요? 부모님께 보내려고요. 그분들이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편하게 사시기에 충분할 뿐이죠. 아, 우리가 살길을 선택할 줄 모르기 때문에 궁핍해진다는 거였죠. 우리 부모님도 그랬어요! 그분들은 선택하는 법을 모르셨어요. 『고향에서 환영받는 선지자는 없다』라고 하죠. 알겠어요?
그래서 난 설법을 하려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20여 년이 지난 오늘, 처음으로 자매와 사촌들을 다시 만났어요. 나는 집에 편지를 보낼 때 『오, 나는 이제 부처예요. 벌써 부처가 됐으니 나를 따라 이런저런 걸 배워야 합니다』라고 하지 않았죠, 아닙니다!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해야 해요. 때가 되면 그들은 내게 올 겁니다. 아니라면 광고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 중에 내가 제자들을 꾀어내려 했다고 오해했던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요, 난 그러지 않았죠. 난 우리 가족조차도 끌어들이지 않았어요. 지난 20년간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오늘 나를 처음 다시 만났어요.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들은 중간에 10명이 넘게 모여서 앉아 있어요. 그들 모두가 우리 가족인데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하물며 외부인을 우리 단체로 끌어들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내가 왜 다른 사람들도 아닌 난민을 꾀어내겠어요? 난민들은 이미 지독하게 가난한데 왜 『끌어들이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심각하게 오해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죠. 똑똑한 사람들은 그들을 믿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그들을 믿지 않기에 여기 와서 강당을 채운 겁니다. 만일 그들을 믿었다면 아무도 여기 오지 않았겠죠. 그렇죠? 사실 사람의 마음에는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고 모든 사람이 남을 속이고 싶어 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내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거나 소위 제자들을 낚으려고 신통력을 쓰거나 별난 일을 벌이지는 않아요. 나는 여러분이 이해한 다음,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논리와 명확한 이성을 사용했어요. 여러분은 생각할 겁니다. 『아, 이분 말씀이 옳다. 나도 늘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맞는지 아닌지 몰랐다』 『이제 이분 말씀을 들으니 바로 알겠어. 아, 바로 그거야』 이것은 자신의 총명함을 알아봤다는 뜻입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이 이해한 것을 증명하고 영적 등급이 얼마나 높은지 확인할 뿐이죠. 그게 다예요. 뭘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은 내가 말하는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 말을 하면 이해하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서 내가 개 주민에게 말한다면 개가 알아듣나요? 아니면 여러분의 이해 수준에 이르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말한다면 아이가 알아들을까요? 그러니 나는 가르치되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죠.
그래서 내가 부처나 스승이라고 자만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중생에게 지혜가 있음을 분명히 알죠. 하지만 한 사람이 이미 횃불의 불을 밝혔다면 그 횃불에 닿은 다른 횃불도 밝힐 수 있죠. 그게 다예요. 사실 다른 횃불도 이미 그들 안에 불의 잠재력이 있어요. 그들은 이미 불을 밝힌 사람처럼 불이 붙을 잠재력이 있어요. 다른 횃불을 밝히는 건 불 켜진 횃불이 아니에요. 아직 불붙지 않은 횃불도 이미 그 안에 불의 힘이 있고 불붙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나를 따라 공부하는 많은 사람이 나를 스승으로 부르려 하죠. 나는 그걸 받아들였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스승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 마음에 이미 알고 있지만 잊었거나 어렴풋한 것을 상기시켜줄 뿐입니다. 여러분은 차분히 앉아 이미 알고 있는 걸 알아보거나 확인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내가 강연하러 다니면서 여러분이 이미 아는 것을 기억하도록 조용히 앉는 법을 보여줍니다. 그게 전부에요.
명상은 그런 겁니다. 내가 어떻게 명상하는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완전한 지혜를 어떻게 되찾는지 보여주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잘못된 개념으로 바쁠 겁니다. 돈을 벌고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느라 바빠서 자신의 완전한 지혜를 잊어버릴 겁니다. 그게 전부죠. 그래서 나는 스승이지만, 스승이 아니며, 인간을 구하지만 아무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내게 절하거나 오체투지를 하지 않게 해요, 그건 과하죠. 꽃과 과일을 공양하는 건 그 사람들이 신실하고 먼 데서 온 나를 반기며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환영식 같은 거죠! 그뿐입니다. 난 그런 꽃과 과일을 강요하지도 요청하지도 않았고 그런 의식을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모두에게 그걸 말할 수가 없었어요. 이 사람에게 사지 말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사요. 나는 그런 말을 해야 할 사람 전부를 알지는 못해요. 그들의 자유이기도 해서 못하게 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돈이 있다면 원하는 모든 걸 살 수 있죠. 그리고 원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수도 있어요. 아름다운 여자나 연인에게 선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영적 수행자에게 선물하고 싶다면 역시 그럴 수 있어요.
바깥의 무덤에 가져가려고 그런 걸 사기도 해요. 그것도 괜찮아요. 그걸 나한테 주는 건 밖의 묘비에 주는 것과 비슷해요. 묘비에는 토마스 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잖아요. 그런 묘비에 꽃 같은 걸 줍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에 묘비처럼 앉아 있으니 누구나 뭐든 줄 수 있죠. 나는 세상일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에게 꽃을 주는 건 묘비에 주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 아무도 웃지를 않나요? 왜 미소만 짓고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는 거죠? 웃고 싶으면 웃으세요. 별거 아니에요! 세상에!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그 정도로 자유를 잃었나요?
왜 우리 삶이 비참한지 아나요? 우리 자신이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감히 웃지도 못하고 감히 울지도 못하고 감히 사랑도 못해요! 여러분은 몰래 사랑하고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합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결혼하면 주저앉아 웁니다. 아니면 나중에 그 사람이 부인을 찾으면 여러분은 자살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리석어요! 그렇죠? 왜 말을 안 했나요? 말하는 게 어때서요?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면 당신은 분명히 알게 되고 가서 다른 사람을 찾죠. 자살하는 건 어리석어요. 그렇죠?
그래서 영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부처의 지혜를 얻으려면 영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을 마주할 수 있고, 마음과 정신이 자유롭게 확장하고 그러면 삶이 행복하고 풍족해질 겁니다. 안 그러면 매일 일하러 갔다가 집에 와서는 밥을 하고 잠을 자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납니다. 세상에! 너무 지겨워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린 그런 노예가 되려고 태어나지 않았어요. 매달 대충 백만 원 좀 넘는 월급을 받으며 하루에 10시간씩 자신을 시멘트 벽 속에 가둬야 합니다! 그렇게(하루 10시간씩) 앉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하루에 2시간 반 앉아서 우주의 모든 곳을 여행하라고 하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럼 무얼 할 수 있나요?
그러고는 계속 한탄합니다. 『왜, 삶이 이렇게 힘들고 어둡고 고달픈가?』 이건 우리의 잘못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당당하고 장엄하며 찬란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는 법을 보여줄 수 있어요. 입문을 하든 안 하든, 강하고 건강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무언가를 얻기 원하고 여러분의 재정이나 정신 상태가 허락한다면 그걸 사거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주저앉아서 영원히 망설이진 마세요. 그러면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고통받아요.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에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가서 장미꽃을 사서 곧장 그에게 주며 말하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도 나를 사랑해요?』 『나를 사랑해요?』 만약 그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말하세요. 『잘 가, 다른 사람을 찾으러 갈 거야』 이 세상엔 사람이 모자라지 않아요. 알겠죠?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어리석죠. 어떻게 죽을 수 있나요? 죽으면 안 돼요. 세상엔 사람들이 많아요. 이전 사람보다 더 멋있고, 더 좋고, 재주도 더 많은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어요. 그저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나도 이미 겪었어요.
과거에는 나도 가족이 있었거든요. 우리는 사랑했었어요. 나도 남편을 정말 사랑했죠. 정말이에요. 웃지 마세요. 알겠죠? 내가 그 사람을 떠날 때는 정말 슬펐어요. 나는 떠나고 나서 그가 너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을까 두려웠지만 어쨌든 나는 떠났어요. 그곳에 계속 머물면서 나의 사사로운 감정에 집착하면 내 이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했죠. 기껏해야 서로의 옷을 빨고 서로 포옹하고 허물없이 얘기하고 그러고는 두세 명의 자녀를 두고 그러는 거죠. 우리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겠죠. 그게 전부예요. 나중에 백발이 되고 주름이 생기고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무덤으로 갑니다.
그래서 혼자 말했어요. 『그냥, 떠나서 삶이 달라질 수 있는지 보자』 우린 새로운 뭔가를 해야 하며 한 여자가 다른 여자와 똑같이 태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왜 평범한 여자로 살아야 하죠? 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는 거죠? 이미 그렇게 하는 여자들이 충분한데 왜 굳이 끼어서 같은 일을 하려고 하나요? 이미 사람들로 북적대는 집에 왜 굳이 자신을 밀어 넣으려고 하나요? 이미 가정주부와 엄마와 같은 여자는 수두룩해요. 그건 그들이 하게 둡시다. 우리는 다른 할 일을 찾아요. 알겠어요?
이 삶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는 그 일에 모든 노력과 온 마음과 모든 감정을 기울여요. 그러면 확실히 성공하겠죠. 우리는 성공하면 행복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망설이며 우유부단하고 그냥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며 자신과 남을 탓하고 울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겁니다. 일생을 낭비하면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죠.
그래서 오늘부터 뭐든 원하는 것을 그냥 시작하세요. 그런데 그게 누군가를 해치는지 봐야 합니다. 남들을 해치는 거라면 우리가 원한다고 해선 안 됩니다. 그건 옳지 않아요. 그런 의미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은 가책을 느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업보라고 부릅니다. 업보는 바로 그것이죠. 업보는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걷는 길에 큰 바위를 떨어뜨리거나 우리가 수영하면서 수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이 순조롭지 않은 것 같죠.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걸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거기엔 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아름다운 아내를 얻고 좋은 자녀를 원하면 그건 죄가 아니에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친척이 많은 대가족과 큰 집에 차도 많고 사치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할 때도 피곤하면 안 돼요.
예를 들어, 나는 여기저기를 다니며 비행기를 타고 차에서 내려 이 집 저 집 다닙니다. 어떤 때는 잠들기 전에 밤새워 새벽 5~6시까지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계속 오전 서너 시나, 다섯 시, 여섯, 일곱 시나, 오후까지 강연하고 오후 7시나 8시까지 입문을 준 다음 또 다른 곳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탑니다. 그 다음 날이 되면 똑같은 일이 생깁니다. 아주 조금 자고 조금 먹어요.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피곤하지 않아요. 가끔 피곤한데… 이를테면 날씨가 추우면 그래요. 며칠 전에 사촌이 전화해서 말했죠. 『가끔씩 스승님이 기침하는 걸 봐요. 피로회복제 드셨나요?』 난 안 마셨다고 대답했죠. 어쩌다 제자들이 내가 너무 피곤해 보이면 나도 모르는 뭔가 마실 것을 줍니다. 마시는 빨대를 주는데 피로회복제일 거예요. 그런데 그건 어쩌다 한 번만 마셔요. 순회 강연할 때만요. 이를테면 오늘처럼 3, 4, 5일 연속으로 강연하고 나면 목소리가 쉬어요. 그럼 피로회복제를 주죠. 안 그러면 피로회복제를 먹지 않죠.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주 조금 먹었어요. 죽 반 그릇 정도요. 그것뿐이었죠. 매일 그렇게 먹고 일은 많이 하고 잠은 조금 자지만 아무렇지 않아요.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여러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여러분은 직업은 하나에 두세 명의 자녀와 남편이나 아내가 하나뿐인데도 피곤하죠. 그렇죠?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일해도 일은 끝이 없고 누구를 방문할 시간도, 강연에 갈 시간도 없고, 영적으로 수행할 시간도 없어요.
난 어떻게 시간이 날까요? 나는 영적으로 수행하면서 동시에 입문자를 돌보고 출가자와 재가자를 가르치고 이 나라 저 나라에 가서 가르치고 난민도 돌봅니다. 그런데도 늘 그렇듯이 수행할 시간도 있고 여전히 건강합니다. 여러분은 조금 일하잖아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돈이 있어요, 돈이 있죠! 영적 수행자가 가난해진다면 누가 수행하려고 할까요? 맞습니까? 영적으로 수행하는데 거지가 된다면 왜 수행하겠어요. 그렇죠? 돈은 나쁜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돈이 필요 없다면 다른 걸 위해 저축합니다.